벌써 시간은 밤11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읍내 사는 친구 형이 대구로 가는 길에 마을 어귀까지 내려다 주고 간게 다행이라면 다행 이라고 생각해야겠지.
7월의 여름밤은 이내 낮동안 품고 있었던 열기를 쉴틈없이 내뿜고 있었다.
"아 젠장..이왕 태워 줄꺼면 쫌만 더 태워다 주지."
그렇게 스스로에게 자책 하면서 쪼그만 달에 겨우 비치는 비포장길을 더덤어 걸어 가면서 철산리를 벗어나고 있었다.
이제부터 300미터 정도를 작은 샛강과, 바람소리에 서걱이는 논 사잇길로 가야 내가 살고 있는 모산에 당도하리라.
25년전인가싶다.
중1 겨울방학때만 하더라도 옆 샛강 보에는 물이 넘쳐날 정도로 풍족했고,
또 얼음위에 올라 바닥을 볼라치면 2자가 넘는 깊이에서 헤엄치는 버들치며, 붕어들도 많았었는데..
요즘은 가뭄이 심해서 인지, 아니면 날씨 탓인지 예전만큼의 물구경하기가 싶지 않다.
모산에 다 와가는 모양이다.
이내 시야엔 마을 앞에 있는 지산지의 제방이 들어온다.
언제부터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지 모를 내 아버지의 아버지가 계실적에도 있었다는 지산지는
여태껏 물마른 적이 한번도 없었다.
바닥에서 물이 솟는다는 말이 있어서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바닥을 드러내진 않는다.
언젠가 전원일기 드라마에서 처럼 소쩍새 우는 소리도 정답고...
"어라..누가 밤낚시 하는가보네.."
저만치 제방 끝쪽에 환하니 수면을 밝히고 겨우 보이는 찌를 응시하는 노파.
그냥 지나갈까도 생각 했지만, 물만 보면 대를 드리우고픈 건 나도 어쩔 수 없는지라, 노파 곁으로
벌써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할아버지. 혼자서 적적 하시겠습니다."
묵묵부답..
혹시 입질이 들어오는 중이라 조용하라는 뜻인가 싶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캐미컬라이트가 없다.. 후레쉬인줄 알았던건 옛날 구경만 했었던 칸델라 불빛이고 그로인해
찌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일뿐이었다.
요즘도 있을까 싶은 남루한 삼베 저고리에 틑어진 밀짚모자 밑으로 기름끼 빠진 하얀 턱수염이 보인다.
(나이 드신분들이 새벽잠이 없다고 하더니만, 이분은 밤에도 잠이 없으신가보다)
이렇게 생각하고 찌를 보는데...흐릿하지만 분명 찌가 서서히 올라오는게 보였다.
"할아버지..챔질..챔질.."
역시나 무반응 이시다...
미끼를 새로 다는 모습을 보고...참 이상한 분이다라고 생각하고 집으로 향했다..
한참을 걸어와 뒤돌아보니 희미한 칸델라 불빛은 그곳이 노파가 있는 자리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벌써 2년전의 일이다....
아니 작년에도 그랬다...
매년 읍내사는 친구 희성의 생일날...늦게까지 읍내서 놀다 돌아오는 길엔 어김없이 그 노파는
낚시를 하고 있었다. 아니 그저 저수지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칸델라 불빛을 의지한채로.
어떠한 물음에도 대꾸 한마디 하지 않으셨고, 인근에 사는 분은 아니라는것 정도가 내가 아는 전부다.
오늘은 꼭 한마디라도 듣고 말겠다는 심정으로 제방에 올라서니 사방이 어두컴컴하다.
"하긴 우연의 일치라도 세번까진 무리겠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제방을 따라 걸어가는데..
하마터면 주저 앉을뻔했다.
칸델라 불빛만 없었을 뿐..그 자리에는 노파가 앉아 있었던 것이다..
미동도 없이 찌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저수지를 바라 보는 듯한 모습...
"할아버지."
"할아버지 불이라도 켜시지..그래서 낚시 하시겠습니까?"
노파가 앉아 있는 자리로 내려 가 볼까도 생각했지만, 마음이 그렇지 않았다.
"할아버진 어디 사십니까?"
길에 쭈그리고 않아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형식적으로 물어 보았다.
.
.
.
"저기 뒤에 살아"
한참 만에 돌아온 대답..그게 날 어리둥절 하게 했다.
마을은 50미터 더 가야 있는데..저기 뒤에라면...
제실밖에 더있는가 말이다..
더군다나 제실 입구엔 대나무 숲이 있어서 바람부는 날엔 그앞을 지나 칠라치면 댓잎 비벼대는 소리에 쳐다보기도
힘들 정도였는데...
어디 그뿐인가..
그 제실을 지은 집안이 망해서 예전엔 대궐같은 것이 이젠 심어놓은 향나무랑 잣나무가 멋대로 자라
햇볕조차도 잘 들지 않는데...그런 곳에 영감님이 살고 계셨단 말인가?
지금껏 한번도 못 보았는데...
"에이~할아버지도..농담하지 마세요. 제가 이동네 사는데 사람 사는 것 한번도 못 본 걸요"
.
.
.
.
"광재야~"
날 부르는 소리에 일어서보니 저 멀리서 아버지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참 제가 어린아이도 아닌데..
"예~ 아버지. 저 여기 있어요"
아버지께서 버럭 화내시면서 이러시는 겁니다.
"이놈아! 새벽3시가 다 넘도록 안 들어와서 나와봤다. 어디 또랑에 쳐박혀 사고라도 난 건 아닌가 싶어서"
"아버지도..지금 뭔 말씀을 하시는 거에요..아직 12시도 안될 시간인데....여기 할아버지하고..."
억울함에 증인이 되 주십사하고 할아버지를 찾았으나...안계신다.
그날 알았다.
큰 제조업을 하던 윤씨 집안에서 오래전 인연으로 이마을에 제실을 짓게 됐고..
10여년전 부도로 집안이 풍지박산 나면서 제실 관리는 뒷전이 되 버리고, 결국 마을의 흉물로 남게 된것이다.
3년전 제실 관리를 하시던 최씨 아저씨한테 열쇠를 받아 간뒤 돌아오지 않아 가보니..
제실 대들보에 목메 돌아가신 할아버지...그분이 그 제조업을 창업하신 분이란다.
요즘도 가끔씩 밤낚시를 하면서 제실쪽을 바라 보면서 생각하게 된다.
내가 어릴적 그래도 동네에서 제일 웅장했던 제실에 윤씨집안 행사가 있을때면 넓은 정원과 잘 정돈된 정원수들..
반짝 반짝 빛나던 대청마루...
그 영감님이 대청마루에 앉아 저수지를 굽어 내려다 보시며 무얼 생각하고 계셨을까 라고..
어쩌면 내 건너편 자리에서 영감님은 또다시 챔질도 안할 찌를 들여 놓은채...
상념에 잠겨 계실런지도 모른다.
소쩍새 소리가 수면에 내려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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